전시서문 Exhibition Foreword
무한한 유한성으로서 생명의 힘_안인기(미술비평,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작가의 오랜 화두인 생명에 대한 성찰은 <생명의 풍경>이라는 부제의 이번 전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생명이란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목숨줄처럼 유한하지만 실상 단일한 생명의 흐름으로 통합되지 않는 무한한 유한성을 내속하고 있다. 철학자 들뢰즈의 생각을 따른다면 생명의 속성으로서 무한한 유한성이란 무엇으로든 변모할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지닌, 다른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그렇다고 온전히 개인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처음과 끝을 담지하는 내재적인 힘들을 지칭한다. 우리가 존재의 내재적 힘으로서 생명의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힘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시각적 장을 창조하는 것은 현정아의 전시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생명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흔히 이러하다. 생명이 조화로운 유기체를 만든다거나, 존재의 궁극적인 원리를 지닌 형이상학적 원천, 영원성을 드러내는 본질이라는 관점들이 그것이다. 들뢰즈는 생명이란 조직체가 아닌 개개의 차이와 다양성을 구현하는 분열적이고 생성적인 힘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생명이란 다양한 전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원리이기보다는 개체의 개체다움과 그러함을 이루는 힘으로 보는 것이다. 생명을 생명으로 부르는 것은 생명으로 구성되는 조화로운 우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가진 속성을,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서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태도이다. 생명체의 외피가 드러내는 광휘가 아닌 그 속에 내재한 비가시적 속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현정아가 보여준 관심과 태도 역시 생명체의 외관에 있지 않다. 작가의 작품들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오가며 생명의 현상과 본성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드러낸다. 작품들은 평면 회화의 조화로운 구성을 표현한 듯하지만, 예측불허의 이질적이고 생경한 붓질 흔적과 얼룩 덩어리, 세심한 붓질과 즉흥적인 터치들이 중첩되며 함께 드러난다. 작가의 계획적인 붓질과 흘러내린 우연의 얼룩은 서로 충돌하고 뒤섞이며 화면에 이중적 공간들을 만든다. 그것은 마치 생명의 무한한 유한성의 힘과 마주친 작가의 본능적 감각의 기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속성으로서 무한한 유한성이란 무엇일까? 유한성은 생명체의 삶과 생애로 나타나는 생로병사의 순환고리로 전개되는 시간축의 속성이라면 무한성은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몸이 선취한 실존적 생명, 우주의 에너지와 자연의 힘처럼 모든 생명에 공통되는 살아 있다는 생기와 같은 공간축의 속성이다. 현정아는 무한성으로 확장되는 생명의 역동적인 가능성을 미시적이고 심상적인 이미지들로 제시하였다.
작가는 대상의 유동적이고 비정형적인 변모 과정을 주목하고 있다. 고정된 모습을 벗어나 다양체로 변화하는 생명은 더 이상 하나의 기억이나 생애를 보유하지 않는다. 액체적 유동성과 식물성, 동물성, 유기체성의 경계가 와해되고 겹쳐지며 펼쳐지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어떤 작품은 방사형의 힘의 방향성을 지닌 생명의 발산과 수렴의 흐름을 드러낸다. 때로는 뉴런의 신경망이나 살 덩어리들이 형성적 에너지를 축적하며 부유하거나 파문을 그리며 펼쳐진다. 흘러내리는 안료나 물방울 무늬들은 형태를 확정하지 않은 중첩되는 붓질의 격랑 위를 표류한다. 화면 속 형상들은 어떤 식물성, 동물성을 목적으로 생성될 것인지 예정할 수 있지만 무엇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그래서 무엇으로든 이룰 수 있는 불확정의 가능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현정아가 제시하는 화면은 고유한 목적과 방향을 향해 성장하는 정해진 길을 걷는 생명이 아니다. 현정아는 생명의 합리적인 능력 이전에 담긴 역량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유한한 생명에 담긴 무한한 역량이고 주어진 목적을 향해 성장하는 능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으로든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변신하고 이루어내는 생명 스스로의 힘을 그리고 있다. 특정한 생명체로 구별되기 이전의 배아에 잉태된 힘들, 무엇으로든 나타날 수 있으면서도 변화하는 생명의 역동적인 힘들을 현정아의 화폭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작가노트 생명은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오게 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러한 생명과 자연에 대해 관심을 두고 오랫동안 작업을 진행해 왔다. 생명현상을 내면 깊숙이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과 그것을 멀리 떨어져서 관조하듯 관찰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생명의 유기적인 순환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한국의 산수화를 바라보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생명을 하나의 풍경으로 재현해 보는 과정에서, 원형의 형상들은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세포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우주가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꽃잎이 무한 반복되는 듯한 작품에서는 작은 생명체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생명의 지속적인 변화 가능성과 역동성을 담아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시선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 내용은 전시 소개 자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The above is an excerpt from the exhibit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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