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 Exhibition Foreword
김보라(예술학, 홍익대학교 회화과 초빙교수) 생태적 삶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과 일상의 실천으로부터 온다. 나와 내 곁의 사람, 매일 생활하는 공간, 내가 발 딛고 선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 모두 그물망처럼 얽혀있다. 지극히 당연하나 흔히 잊고 사는 사실에 마음이 가닿는 순간, 수많은 존재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홍진숙 은 그의 삶이 펼쳐져 온 제주의 신화와 역사, 자연을 주제로 30년 넘게 작업하고 있다. 채색화, 소멸 목 판, 실크스크린, 모노타이프, 콜라주, 그림책 등 다양한 매체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온 그의 20번째 개 인전이 서울에서 개최된다. 전시 《겹겹의 시간, 섬》을 통해 홍진숙은 곶자왈(제주어로 숲과 덤불이라 는 뜻)과 용천수를 그린 회화, <탐라순력도>(1703)를 재해석한 작업을 선보인다. <탐라순력도>란 제주 목사였던 이형상의 주도하에 화공 김남길이 제주 고을 여러 곳을 그린 채색화 40여 점으 로 구성된 화첩을 가리킨다. 홍진숙은 그림 속에 묘사된 장소를 직접 찾아가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탐라순력도>에 담긴 18세기 제주와 자신이 목격한 21세기 제주를 그림으로 결합한다.
중국 태생의 미국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Yi-Fu Tuan, 1933-2022)은 저서 『토포필리아: 환경 지각, 태 도, 가치의 연구(Topophilia: A Study of Environmental Perception, Attitude, and Values)』(1974) 에서 '장소에 대한 인간의 사랑(the human love of place), 즉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논한 바 있 다. 홍진숙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문득 이 개념을 떠올렸던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시금 그 의미를 헤 아려본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topos와 사랑을 의미하는 philia를 결합한 용어 토포필리아가 분 자 그대로 자신이 머무는 장소에 대한 사랑이라면, 여기서 사랑이란 대체 어떤 정서와 감정을 뜻하는 가. 이-푸 투안은 사람이 살아가려면 자기 세계에서 어떤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쓴다. 그는 토포필리 아 개념의 복잡성을 인정하면서 토포필리아와 연관하여 '신체 접촉(physical contact)'과 '과거에 대한 인식(awareness of the past)'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바로 홍진숙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 이기도 하다.
홍진숙은 2000년대에 제주 섬의 신화를 소재로 다채로운 판화를 제작했고 2010년대 들어 용천수를 찾아다니며 제주의 물길을 기록했으며 제주의 허파라 불리는 곶자왈을 그렸는가 하면 전 지구적 전염 병을 겪었던 2020년대에는 제주의 과거 모습을 담은 <탐라순력도>를 모티프로 한 작업을 본격화했다. 홍진숙의 작품을 통해 300년 간격을 둔 제주의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새로운 <탐라순력도>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을 탄탄히 지탱해온 두 죽은 역사 탐구와 꾸준한 현장 답사다. 작가는 제주 신 화나 무속 문화와 관련된 유적지를 찾고 제주 바당길을 몇 바퀴씩 걷는다. 그뿐만 아니라 해녀학교에서 물질을 배워 겨울 바다에 몸을 담그고 빗속에서 곶자왈을 그리기도 한다. 이처럼 몸으로 체득한 제주 를 자신만의 미술 언어로 옮겨낸다. 섬을 걷다 주운 나뭇잎, 오름에 피어난 작은 꽃부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곶자왈, 척박한 땅에서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홍진숙의 눈과 손을 거쳐 이미지로 전개된다. 작품 앞에 선 감상자는 작가의 역사 이해와 신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제주의 풍광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 <겹겹의 시간, 섬>에서 우리는 홍진숙 작가가 자연이라는 씨실과 역사라는 날실로 직조한 '생명의 태피스트리'를 통해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만난다. 그가 기록한 제주의 이미지에는 오랜 시간 직접 경험한 경이로운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 홍진숙의 그림책 제목 『작은 씨 앗」(2015)처럼 그의 작품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잔잔하게 퍼뜨리고 있는 듯하다. 사랑은 단지 머릿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이어지는 실천이며 '나'와 '우리'에 대한 사랑은 내가 사는 장소와 그 장소가 품은 시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홍진숙의 예술은 전 지구 적 자본주의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기억하고 자연의 생명력과 지역성의 가치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위 내용은 전시 소개 자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The above is an excerpt from the exhibit introduction.